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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cism

keep 2008. 3. 28. 18:44


글_박순욱 / CEO Report(www.ceoreport.co.kr) 경영사례분석가




욕망과 지혜

알렉산더가 동방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무렵
해상도시 티루스(Tyrus)는 알렉산더가
점령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티루스는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로 주변과의 통상으로
경제적으로 풍요하였으며,
문화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향유하였다.
알렉산더가 처음 티루스(Tyrus)를 공격했을 때 티루스는 다음의 조건을 충족시켜 준다면
기꺼이
그의 속국이 되겠다는 전갈을 보내온다.
그 조건이란 ‘알렉산더와 그의 군대가 티루스 공화국 영내로
들어오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알렉산더는 조그만 도시국가가 자신에게 조건을 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티루스를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수개월을 공격하고도 알렉산더는 티루스를 함락하지 못한다.
알렉산더는 작은 도시 하나를 얻는데 너무 많은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티루스인 들이
내건 조건을 들어주겠다는 사절을 파견한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그들에게 굴복했다고 오판한 티루스인들은 승리감에 들떠 사절들을 죽여 버린다.
이에 분노한 알렉산더는 전력을 다해 티루스를 공략하여 도시는 파괴하고 도시민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버린다.
하나의 조직이 파멸될 때에는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다.
티루스(Tyrus) 파멸의
경우 알렉산더의 공격이 외부적 요인이라면 내부적 요인은 티루스인의 오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직은 항상 외부적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그 어떤 조직도 외부적 공격이나 위협이 없이
평화만을 구가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국가조직이든 기업조직이든 조직은 외부와의 교류에 의해
존속하지만, 외부와의 교류 그 자체가 위협요소이다.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조직을 유지하는 도구는 내부 구성원들의 욕망과 지혜이다.
외부와의 교류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는 욕망, 외부와의 교류에서 오는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
조직을 유지하는 두 가지 도구는 욕망과 지혜이지만 욕망은 지혜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만일 구성원의 지혜로서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나, 지혜를 능가하는 구성원의 욕망이 우선한다면
욕망은 조직을 유지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조직의 파멸시키는 암적인 요소가 된다.
티루스(Tyrus)의 경우, 처음 알렉산더의 공격을 받았을 때는 적절한 조건을 제시하며 외부의 공격에
슬기롭게 대처하지만, 알렉산더의 제안을 받고 승리감에 도취되었을 때는 욕망,
즉 알렉산더를
비웃어 줌으로써 승리감을 만끽하고 싶은 욕망이 지혜를 우선한다.
결국 티루스를 멸망시킨 것은 지혜를 우선하는 욕망이었다.
구성원들이 자신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욕망에 충실할 때 욕망은 더 이상 조직을 유지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조직을 파멸시키는 요인으로서
작용한다.


파시즘의 위험

파시즘이란 이탈리아어의 파쇼(fascio), 즉 묶음에서 유래되지만 결속, 단결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파시즘이란 용어를 운동권, 정치권에서 주로 듣고 정치적 용어로 해석하지만
질 들뢰즈
(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는 거시정치의 개념이 아니라
‘대중들의 상호작용과
전염에 의해 번식되는 욕망의 흐름’으로 규정한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파시즘은 어디에나 상존한다. 국가적 파시즘, 지역적 파시즘, 사회구성 단위별 파시즘, 가족의 파시즘, 개인의 파시즘 등등.
우리가 파시즘이라고 할 때 파시즘은 ‘암적인 세포’의 의미로 사용될 때의 파시즘이다.
암(癌)세포는
개체의 필요에 따라 규칙적이고 절제 있는 증식과 억제가 아니라
조직 내의 필요성을 무시하고
무제한 증식을 하는 미분화세포다.
욕망의 무제한적 증식.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우선하고 무제한으로 증식하는 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즘이란 결국 소수자의 희생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욕망의 무제한적 증식이다
암세포의 무제한적 증식은 신체의 죽음을 불러온다. 조직의 파시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국가적 차원의 파시즘만이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단위의 파시즘은 자신의
파멸과 주위의 파괴를 가져온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고 자신의 이익이 타인의 이익보다 우선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위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개인의 파시즘이다.
조직의 파시즘, 자신이 속한 조직만이 지고한 가치를 가지며 자신들의 행동강령만이 유일하게
존귀하며, 타인의 가치기준은 무시하고 자신의 가치기준을 다른 조직에게 강요하는 조직이라면 조직의 파시즘이다.
기업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생존에 필요한 이익만이 유일한 목적이며, 주위의 모두가 오로지
경쟁자로만 인식되며, 소수자(하청기업, 비정규직 등)의 희생을 당연시 한다면 기업의 파시즘이다.
파시즘적 개인, 조직, 기업이 일시적 번영은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이 부른 힘의 결집은
반대세력을 용납하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는다.
그러나 그 상태가 영속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욕망의 양면성

노자(老子)는 견강자 사지도 유약자 생지도(堅强者 死之徒 柔弱者 生之徒 ; 견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유약한 것은 삶의 무리)라 하였다.
사고(思考)의 경직이 조직을 경화시킨다. 죽음의 무리를
피하기 위해 사고의 유연성을 잃지 마라.
유연한 사고를 견지하기 위한 노력은 경직된 사고가 불러올 참화를 피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유연성의 함정은 경직된 사고 보다 더 큰 참화를 불러온다.
유연성의 함정을 피하라.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는
“약간의 유연성이 사태를 좀 더 낫게
하는데 충분하리라는 믿음을 피하라.”고 말한다.
자칫 유연성은 통제 불가능한 사태를 불러 올 수
있다는 뜻이다.
유연성의 전제는 다양성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소수자의 희생을 전제하는,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유연성은 경직성보다 더 큰 피해를 가져온다.
잘못된 방향의 욕망에 기초한 유연성은 사태의
악화를 가져올 뿐이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상대의 잘못에 대한 유연함, 상대의 잘못된 욕망에 대해 적당히 눈감음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연한 사고. 이런 유연한 사고의 집합이 조직으로,
사회로, 국가로 번져 나갈 때
조직은, 사회는, 국가는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잘못된 지도자로 인해 조직이 패망의 길로 들어서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조직 구성원들의 몫이 된다.
그러나 잘못된 지도자로 인해 조직이 패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만은 아니다.
조직 구성원의 그릇된
욕망, 어긋난 욕망의 거대한 공명이 한 점으로 모여들 때 조직은 패망한다.
분명 욕망은 조직을 유지하는 도구이다.
개인의 욕망, 조직의 욕망. 욕망이 발전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지혜보다 앞서는 욕망, 소수자의 희생을 전제하는 비도덕적인 욕망,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욕망,
그러한 욕망의 충족을 위한 유연성은 개인이, 조직이 반드시 피해야 할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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